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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에게 청춘의 길을 묻다

  • 작성자 :홍보팀
  • 등록일 :2017.11.23
  • 조회수 :2592

다산에게 청춘의 길을 묻다

백민정 교수(철학)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까지 펼쳐진 조선 후기의 격동기, 그 거센 변화의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 내며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실학의 대부’ 다산 정약용. 정밀하게 조립된 그의 사상을 하나하나 분해하고 살펴보며 현대사회와 청춘들에게 유익한 메시지를 전하는 한국철학자가 있다. 가톨릭대 철학전공 백민정 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중용에 빠진 철학도, 다산에 주목하다

프랑스 현대철학을 공부하던 한 철학도에게 우연히 접한 『중용』은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선배들과 책을 강독하며 동양철학에 녹아들어 있던 삶과 사유 사이의 균형감에 커다란 매력을 느낀 그녀는 방향을 돌렸다. 동양철학을 공부하며 ‘주희(朱熹)’를 주제로 쓴 논문을 통해 석사 학위를 받았고, 조선 유학으로 넘어와 다산 정약용을 파고들었다.


백 교수의 박사 논문인 <정약용 철학의 형성과 체계에 관한 연구: 주자학과 서학에 대한 비판적 수용 과정을 중심으로>는 2007년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우수연구상을 수상했고, 이 논문을 보완해 펴낸 『정약용의 철학』은 한국철학계 안팎에서 호평 받았다. 그 후 7년이 지난 2014년 3월, 그녀는 가톨릭대 철학과와 인연을 맺으며 자신의 연구에 한층 깊이를 더하게 된다. 백민정 교수가 걸어온 지난 20여 년의 행적은 이렇듯 꾸준히 다산 정약용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녀가 이른바 ‘다산 전문가’로 통하는 이유다.


백민정 교수가 정약용을 연구하기로 결심한 데에는 정약용의 사상적 깊이와, 이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서양 문물의 본격적인 유입으로 인해 일대 격변기를 맞은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반의 조선 사회, 그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사상을 문신처럼 깊게 새긴 정약용이라는 인물에 깊은 매혹을 느낀 것이다.


“정약용의 사상과 그 연원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주자학, 그중에서도 성호학파와 천주학을 중심으로 하는 서학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를 박사 논문으로 썼습니다. 이후 정약용과 그 무렵 조선 사상가들에 대한 연구를 이어오고 있죠. 우리나라에서 천주학, 즉 가톨릭을 자생적으로 받아들인 첫 집단이 정약용을 포함한 성호학파인 만큼, 제 나름대로 가톨릭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 깊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개혁과 보수의 접점에 선 정약용

백민정 교수는 널리 알려진 개혁 사상가로서의 다산보다 보수주의자 정약용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정약용의 개혁이 기존의 법도를 개량해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하려는 수준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백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정약용은 예(禮)를 기본으로 한 소위 ‘예치 시스템’을 강조했다. 그는 개인이 아닌 사람과 사람 간의 인간관계인 ‘인륜’을 강조하고, 인륜으로 인해 만들어진 질서를 어떻게 조화롭게 유지시켜 나갈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목민심서』에는 사회 구성원들의 신분을 구별하는 ‘변등(辨等)’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으며, 친소 관계와 ‘삼달존(벼슬·나이·덕행)’의 차등적인 대우를 정당화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정약용의 개혁 의지 또한 빛난다고 말한다. 정약용이 이야기하는 등급은 ‘조선’하면 떠올리는 세습적인 신분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능력, 노력, 성취도, 인품 등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기준을 바탕으로 개개인을 평가하고 이에 따라 차등적으로 대우하는 후천적 변등을 주장한 것이다. 한편 그는 『경세유표』의 ‘구직론’, 즉 아홉 가지 직업 종류를 제시함으로써 한량이라고 불리며 경제활동을 하지 않던 사족(士族)들에게 사회적 책무를 부여하려 했다. 더불어 사족들의 전세(田稅)와 군역의 의무를 강조함으로써 오늘날도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는 ‘조세 정의’를 실현시키려 애썼다.

“정약용은 널리 알려진 대로 개혁적인 면모가 뚜렷한 동시에, 보수적인 측면과 이로 인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개혁적 한계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약용을 ‘모든 진보적 대안의 첨단에 서 있었던 인물’로 우상화하면 곤란합니다. 보다 객관적이고 다각적인 시선으로 정약용을 바라보고 평가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다산의 메시지, 그리고 새로운 출발

백민정 교수는 정약용이 시대적 변혁기를 맞아 기존 질서와 외부로부터의 새로운 충격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췄는지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내외 정세가 당시 조선의 상황과 거의 흡사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이럴 때일수록 정약용과 동시대 사상가들이 어떤 식으로 처신했는지를 그들의 텍스트를 통해 세세하게 분석하고 그곳에서 교훈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정약용은 자신의 삶을 통해 가톨릭대 학생들과 대입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 즉 청춘들에게도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는 스물여덟에 벼슬길에 오른 뒤로 10년 넘게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소위 잘나가는 인생을 삽니다. 그러다가 서른아홉에 정조가 사망하자 천주교 사상범으로 몰려 긴 유배생활을 겪죠.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정약용의 업적 대부분이 바로 이때부터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단장(斷腸)의 고통 속에서도 통렬한 자기반성과 끝없는 노력으로 대업을 이룬 것이죠. 이런 정약용의 삶의 궤적은 청춘들에게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해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에게서 많이 위로받았으니까요.”



백민정 교수가 요즘 몰두하고 있는 일은 조선 법전인 『속대전』, 『대전통편』 속 국가 운영 시스템과 정약용이 『경세유표』를 통해 제시하는 국정 원리를 비교 분석하는 연구다. 또한 세계관을 확장해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청나라의 황제 중심 통치 구조를 비교하고 이에 대한 입체적인 평가를 내리려는 연구도 진행 중이다. 오랜 기간 연구했지만, 백민정 교수에게 정약용은 여전히 호기심의 대상이며 존경하는 선배 학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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